이정근 목사(세계한인기독언론협회 초대회장)
예수님을 모욕하는 말이나 행동들이 여럿 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몇 개나 된다. ‘아니, 목수 아들 주제에.......’ 고향 사람들이 그렇게 천시했다. ‘너는 귀신이 들렸다,’ ‘너는 미친놈이다,’ ‘너는 음란 가운데서 태어난 자식이야,’ ‘네가 메시아라고?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와 봐,’ 그런 모욕들이다.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가시관 씌우고, 옷을 벗겨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흉악범 취급을 했다. ‘무식한 놈’이라 한 것도 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요7:15)며 놀라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다. 가방 끈이 짧다는 뜻이다. 문맹률이 매우 높던 그 당시니까 목수 주제에 글을 읽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으셨으면서도 어쩐 일인지 글을 쓰신 일이 별로 없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내용을 글로 친히 써 놓으셨다면 우리가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읽고 더 큰 은혜를 받았을 것 아닌가. 그래도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이 딱 한 번 있다.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과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였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복음 8장 6-8절 말씀이다. 그런데 그 때 땅에 쓰신 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왜 그처럼 중요한 것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기록되었다면 참으로 귀중한 하늘의 진리였을 것이고 그래서 설교의 좋은 근거가 될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직접 손가락으로 돌비에 새겨 쓰신 것처럼 예수님의 손가락으로 직접 쓰신 내용이 그토록 중요할 터인데 왜 그것이 빠져 있을까.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때 땅에 쓰셨던 글의 내용을 추측한 몇 가지 가설을 내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은 그 여인을 성매매 현장에서 붙잡아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죄목이라 했다. 가령, ‘그 여자와 음행한 것은 바로 너희들 아닌가.’, ‘그러니까 너희들이 들고 온 그 돌로 처 죽여야 할 대상은 바로 너희 자신 아닌가.’ 그런 것들 말이다. 성경 인물 가운데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일 것이다. 주일예배 때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사도신경을 외우기 때문이다. 예수님 사형 처분한 죄로 말한다면 가룟 유다, 대제사장, 바리새파들의 죄가 훨씬 더 큰 것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을 살려 내려고 세 번이나 애썼던 자기에게만 왜 그토록 저주를 퍼붓는가. 그런 억울함이다. 빌라도는 그 후 총독에서 파면되었고 비참하게 죽었다는 전설도 있고, 그 아내의 전도로 좋은 신자가 되어 ‘빌라도의 고백’을 남겼다는 간증도 전해 온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예수님 십자가에 써 붙인 죄패가 그의 믿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요19:19)이었다. 그것도 당시의 국제언어였던 히브리/헬라/로마 말로 적어놓아 기독교가 온 세상으로 확산될 것도 예견하게 했다. 이 죄패 내용에 대하여 반대파들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자칭 유대인의 왕’ 곧 가짜 메시아라고 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고 했던 말이 무엇인가. “내가 쓸 것을 썼다.” 바로 그것이다. 나사렛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선언을 일점일획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글목회’라는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필자는 글을 쓸 때마다 반드시 자신에게 묻는 것이 있다. “너는 써야만 할 글을 써 놓았느냐?” 그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남미복음신문> 창간 9주년 축사로 다시 한 번 선물한다.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가슴에 품고, 쓸 것을 반드시 써내는 더 좋은 신문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런 기도가 발행인을 비롯하여 편집 참여자, 보급봉사자, 재정지원자, 그리고 독자 모두의 기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