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선 목사(베데스다교회)
이사야 53장은 메사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예언으로 유명하다. 그 메시야는 모양도 풍채도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게 될것이라는 것이 1-3절의 내용이고, 4-6절은 메시야의 고난은 자신의 죄책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맞어야 할 채찍과 징계를 대신 당하신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오늘말씀을 통해 주님이 겪으신 온갖 고통과 수모와 죽으심이 “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자원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때 온 무리들은 예수님이 유대의 왕으로 등극하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줄 알고,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를 꺽어들고 호산나를 부르면서 환영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나의 죄악과 허물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뜨거운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마음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었다. 그 이유는 본문 2절이 밝힌대로 외부조건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바람에 꺾이고 발에 짓 밟히면 으깨지는 연한 순과도 같이 나약하고 애처러운 존재였다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연한 순은 마른땅을 뚫고 솟아오른 싹이었고 줄기였다. 바위는 땅을 뚫고 자라지 못하지만 대나무 같은 연한 순은 굳은 땅을 뚫고 자라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지만,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의 공로를 믿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진 기독교는 온 세계를 점령하였고 세계역사를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저나 여러분들도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왜 누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바로 알고 금번 고난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1. 잘못 된 우리들의 생각을 고쳐야 한다.
본문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다. 주님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예수님 자신이 저지른 어떤 죄 때문에 받는 보응이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 때문에 주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믿어야 한다. 여기에 인간이 구원을 받는 중요한 열쇠가 있는 것이다. 본문 4-6절에는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번이나 거듭되고 있다. 그것은 주님이 겪으신 고난에 대한 잘못된 우리의 생각을 바로 잡어주려는 의도인것이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우리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께 대한 감사도 없고 예수를 믿을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되므로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2. 메시야의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본문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다. 주님이 가시관과 예리한 창에 찔리고, 채찍에 맞어 상처받고,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런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사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육신적인 고통도 있지만, 마음 고통 때문에 불안과 공포속에서 떨고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한 정신과 의사라도, 우리의 마음 고통이나 불안한 마음은 고칠 수가 없고 평안을 줄 수가 없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과 질병을 내대신 모두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주님께 맡기고 의지 할 때만 해결이 되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가 있다. 내가 맞을 곳을 주님이 대신 맞으셨고, 내가 당할 곤욕을 주님이 치루셨다. 그래서 내가 평화를 찾았고 고침을 받았으며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3. 대속은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것이다.
본문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다. 우리는 철없는 양 같아서 제 멋대로 살아왔다. 다시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내 생각대로 살아왔다. 양이란 동물은, 성격은 온순하고 아둔하면서도 고집이 있다. 양은 목자의 인도가 없으면 먹을 것도 못 먹고 물도 마실 수가 없는 동물이다. 그리고 이리가 와도 막을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의 마음대로 목자의 품을 떠나 위험한 곳으로 달아난다. 그러다가 엉겅퀴에 걸리고 가시에 찢기고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져서 다리가 불어지고 상처를 입고 신음 할 때에, 잃은 양을 찾아 헤메이던 목자의 손에 구출되어 고침을 받고 평안을 다시 찾게 되는 동물이 양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처지인 것이다. 아무 힘도 없고 앞을 내다 보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제 멋대로 하나님 없이도 살아보겠다고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다가 병들고 상처 입고 죄투성이가 되어 한숨 짓고 우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인생은 마땅히 하나님의 인도하신 길로 갔어야 할 터인데 다 각기 제 길로 갔으니 그것이 죄악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이러한 죄인인 줄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은, 우리의 죄악을 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시49:7-8절에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했으니 속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속죄적 희생으로만 인간의 죄의 구속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된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대속의 은총인 것이다.
4. 우리의 죄악을 주님이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로 인하여 중벌을 받고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길은 죄가 없는 그 누가 내 죄를 인해 대신 죽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죄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대속의 제물로 죽게 하신 것이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 죄값은 주님이 지시고 내대신 고난도 받으시고 죽기도 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은혜인것이다. 대속이란 말은 “댓가를 지불하고 속박상태에서 벗아나게 해 주었다”는 뜻이다. 빚에 팔려가는 불쌍한 노예를 본 어떤 사람이 그 빚을 대신 갚어주고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었다면, 그 노예는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그 은혜를 일생동안 잊을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의 권능으로 이 험한 십자가를 지시지 않을 수도 있었건만, 죄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들을 보시고 하나님의 아들 됨을 포기하시고 쓰리고 아픈 십자가를 지시기로 자원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누가 나의 적은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내고 싸우려고 덤벼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피가 흘러도 잠잠히 참고 견디는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셨다”고 사53:7절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할때, 힘들고 어렵고 억울한 일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고 참아야 한다. 억울한 것으로 말한다면 예수님 만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고통이나 아픔으로 따진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 만큼 더 아픈 일이 또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할 말이 있다면, 우리 주님 만큼 변명할 말이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인간 본연의 나의 모습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 밑에 나아가, 사랑의 십자가, 인내의 십자가, 소망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병든 영육의 마음과 몸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금번 고난주간에 이러한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