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금옥 박사(기독교상담박사)
키예프(Kiev)에서 올레그 공의 손자이자 스뱌토슬라프(Svyatoslav)의 아들인 성공(聖公)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956~1015, 재위 980~1015)는 공국과 인접한 슬라브인 등 여러 종족을 정복합니다. 큰 유목민 세력이었던 폴란드의 공격도 잘 받아 쳐서 989년 공국의 영토는 흑해, 코카서스 산맥, 볼가 강 하류로 넓히지요. 크림의 헤르소네스도 정복한 그는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의 누이동생인 안나와 결혼하면서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삼고 끼릴 문자의 도입으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문자생활을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궁전에 판테온을 짓고 전쟁의 신 페룬(Перун)을 국신으로 모셨던 블라디미르 대공이 유일신의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는 정략적인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당시 키예프 루시의 영토에 살고 있던 다양한 종교를 믿는 민족들을 하나의 정신적 이념으로 통합해야할 필요와 정복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으로 거대국가를 위한 선진 문화 도입이었다고 합니다. 키예프 루시인들은 당시 최고의 찬란한 문화를 누리는 그리스와 좀 더 가까워지고자 하였답니다. 실제 공국은 이후 콘스탄티노플과 서유럽의 여러 기독교 국가들과 동맹관계를 맺게 되지요.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옛 사람을 버리고 성도로서의 생활로 바꾸고 학교와 교회들을 세우며 우상을 파괴하고 그리스 선교사들을 영입합니다. 로마(Roma)와 대사를 교환하고, 특히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의 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는 대사들을 파견하여 각국의 믿음을 살피고 보고하도록 하였답니다. 여러 곳에서 돌아온 대사들은 각 예배와 교회 그리고 백성들의 믿음을 보고했대요. 여러 유익과 경건이 있었지만 그들을 감동시킬만한 아름다움이나 기쁨은 느끼지 못하였다는 보고 후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성당의 예배에 참석했던 이들은 다른 보고를 드렸대요. “우리가 본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천국에 있는지 이 땅에 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계셨고, 그들의 예배는 다른 모든 나라의 예전을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나 음주 금지 계율 때문에 술을 즐기는 러시아인들에게 맞지 않는다며 거부했고, 가톨릭은 의식이 밋밋해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사신의 보고를 받고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였답니다. 자국의 신하들와 논의한 끝에 러시아인들의 기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동방정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뛰어난 고도의 문명을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예식서, 교부들의 저작 등을 슬라브어로 읽을 수 있었으며, 이것들을 토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슬라브어는 모라비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의 키릴문자 발명으로 고안되었던 것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기독교 개종은 이 키릴 문자로 된 슬라브어로 믿음이 굳게 서게 되었고 교회예전들은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슬라브어로 진행되었답니다. 기독교인 된 뒤에도 블라디미르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너그럽지 못함은 자신의 왕국을 기독교 신앙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였다고 하여서지요.
이름 없는 상인들과 왕을 감동시켰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야만족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신앙의 왕비. 이렇듯 기독교는 영웅적인 선교사나 왕의 공헌이라기보다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을 믿음으로 초대하고 복음을 전한 결과 일것입니다. 여러 어려움이 뒤섞여 있었겠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시대 이후 기독교 국가가 되어 믿음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우크라이나 화페 1흐리브나 에 블라디미르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지요. 뒷면은 그가 건설한 블라디미르 요새랍니다.
1015년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대공의 사망은 곧 내란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맏아들인 스비야토폴크는 자신의 위치를 염려하여 자신의 형제들인 보리스(Boris)와 글렙을 제거하고 대 공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됩니다. 보리스와 글렙은 충분히 형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해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목숨을 희생하였다고 전해내려 옵니다. 이렇게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던 스비야토폴크 역시 1019년에 또다른 형제인 야로슬라브(Yaroslaw) 공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의 뒤를 이은 3남 야로슬라브(Yaroslaw the Wise 980~1054)는 형 스비야토풀크 를 물리치고 대공이 됩니다. 그는 여러모로 아버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답니다. 아버지처럼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인물로 아버지의 정책도 대부분 이어받아 주변의 여러 종족을 무릎 꿇게 하고 기독교 전파에도 힘을 기울입니다. 공은 현자로 불리었으며 블라디미르에 이어 기독교화하여 최전성기를 이룹니다. 1037년 야로슬라브 공은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 건립하게 합니다. 사후 러시아 카톨릭4의 수호 성인으로 러시아 역사에 영웅으로 추앙 받지요. 부친이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대부분 찿아 확장 하였으며 인구는 약 오백만으로 확대 되었답니다.
그는 전쟁이나 정복의 지도자로서보다는 성속(聖俗)문화의 추진자,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한 입법자로 어진 대공이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교회의 열성스러운 보호자로 비잔틴식 성당을 키예프와 노브고로트에 세웁니다. 야로슬라브 역시 아버지처럼 결혼을 통해 확장하지요. 스웨덴 왕녀와 결혼하였으며 딸들은 프랑스, 노르웨이, 헝가리 등으로 시집보냅니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키예프 루시는 1054년 그의 사후 분열되었습니다. 자식들간에 권력투쟁은 내전으로 비화하였고 각 지역 세력가들이 활개칠 빌미를 제공하며 무정부 상태가 되었답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국은 여러 소공국으로 나누어지다 1237년 키예프 루시는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집니다. 몽골은 영토 전역을 파괴하고 소공국들은 몽골에 공물을 바쳐야만 하였답니다.(김대성 목사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