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질: 잡념과 표적(2)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은 아슬란의 표적을 만나기 위해 힘겹게 여행을 하고 있던 질 일행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이 길로 쭉 가면 하르팡 성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점잖은 거인들이 살고 있단다... 확실한 것은 훌륭한 잠자리와 인정 많은 집주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야. 거기서 겨울을 보내는 것이, 그게 안 된다면 며칠만이라도 쉬어 가는 것이 현명할 거야.” 그리고 곧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덧붙인다. “하르팡에 도착하는 날이 언제든 성문에 너무 늦게 도착하지 않아야 해. 그 거인들은 정오에서 몇 시간만 지나면 성문을 닫아 버리는데, 일단 문을 닫으면 아무리 두드려도 절대로 열어주지 않는 게 그 성의 관례이니까 말이야.”
처음부터 녹색 옷의 여인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전혀 신뢰를 하지 않은 퍼들글럼과 달리, 질과 유스터스는 벌써 ‘훌륭한 잠자리’와 ‘융숭한 대접’에 대한 상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서 그 ‘점잖은 거인들’이 살고 있는 성으로 가자고 하면서 길을 재촉하였다. 퍼들글럼의 신중함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아슬란의 두 번째 표적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녹색 옷의 여인의 말이 아슬란의 두 번째 표적의 핵심 단어들과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아는 사람은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이미 창세기 3장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다. 바로 ‘시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에 만드신 동산으로 보내셔서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창 2:8-15). 이 때 하나님께서 첫 언약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여기서 핵심 단어는 ‘열매’, ‘먹는다’, 그리고 ‘죽음의 필연성’이다. 즉,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고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고 먹으면 그것은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말씀을 하와는 어떻게 이해했는가? 마귀가 그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답은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다”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3).” 우선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 가지 요소를 더했다. ‘만지지도 말라’와 ‘죽음의 가능성’이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언약의 말씀을 사랑의 표현이 아닌 일종의 접근금지령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오해는 그녀 안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꼼짝 못하게 통제하신다고 생각하는 불만이 자리잡게 했다.
그러자 마귀는 이 개념을 모두 사용하여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먼저 ‘죽음의 가능성’을 없애 준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또 ‘만지지도 말라’, 즉 접근금지령(하와가 생각하기에)을 없애 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불만을 없애 준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