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성 목사(브라질선교교회 담임)
유권사님, 10년 전 권사님를 비롯한 온 교우들과 제가 함께 신앙을 일구던 영은교회는 새로운 식구를 진심으로 맞이했고, 사모의 공백을 메꾸며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브라질로 목회지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모가 되기 전 김선영 사모는 오십년을 일과 결혼하고 살았습니다. 일산 신도시에 고양 와이(YWCA)를 새롭게 이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십여 년의 청춘을 거기에 갈아 넣으며 자기개발에 힘을 썼습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성서공회와 여성기관YWCA에서 일하며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심화시키고 청소년복지관과 종합사회복지관관장과 이명박 정부시절 보건복지부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늦깎이 결혼 10주년이 되었다
그리고 평택시에 있는 팽성노인복지관장을 할 때 저를 만나서 함께 목회길에 들어섰습니다. 2013년 2월에 정동교회에서 한 방향을 향해 함께 가기로 서약하고 한동안 주말부부로 살았습니다. 아내는 평택에서 저는 강화에서 각각의 현장을 섬겼고 주말에 영등포역에서 만나 함께 교회를 섬기고 아내는 평택으로 저는 강화도에 살며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브라질선교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를 보고 2015년 10월에 드디어 브라질 행을 결정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해외문화에 적응하랴, 새로운 목회 현장 파악하랴, 신혼의 결혼생활을 안정시키랴 참 힘들고 숨찬 해외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브라질선교교회에 도착하고 얼마 후부터 현대자동차의 주재원 교체시기와 현지화 정책과 맞물려서 성도주재원들이 빠져나가는 시기였습니다. 교회의 존폐가 걱정되는 때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월세를 못 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교회는 헌금수입보다 고정지출이 더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러다가는 곶감 빼먹듯 하다가 결국 교회파산선고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해외사례들을 살폈습니다.
교회생존의 절박감 속에서 우리는
고정 지출을 줄인 교회는 살아남았고 그것을 간과한 교회는 쓰러졌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한인교회들은 현지의 안정된 교회와 예배시간을 달리하고 시간을 임대해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운영이 어려운 현지교회를 매입하고 현지인 교인들이 시간을 달리해서 예배드리는 역전된 케이스도 자주 발견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잠 못 이루는 시간을 보내면서 두 가지를 다 살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현지인교회는 외곽이 대부분이어서 현지인은 가하나 우리는 노출되어 불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임대가 아니라 매입으로 가야 장기전에 맞설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부동산 회사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던 끝에 오늘 우리 교회 터를 매입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어서 코로나의 엄정한 정국이 닥쳤습니다만 교회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터, 힘을 다하여 이룩한 곳에, 온전히 예배만 드리는 공간을 하나 더 아름답게, 더 정성껏 세워가는 것이 10주년을 맞는 목회자 부부의 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