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선 목사(베데스다교회 원로)
한국의 사단법인 한.백 문화협회와 브라질 현지에서 조직된 브.한 문화협회와 공동으로 농업이민 계획과 이주자 명단을 첨부하여 브라질 정부에 이민허가를 신청하였는데 1962년 5월 17일에 브라질 농업개발성(INIC)에서 33세대가 지명허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브라질 정부는 기독교인 8세대, 천주교인 4세대, 일반 5세대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브라질 이민허가서와 사전 입국허가서를 발급하였다. 그래서 1962년 3월 9일 법률 제 1030호로 공포된 한국 해외 이주법에 의거 해외이주를 받은 17 세대 92명과 이미 이주수속 중인 세대 대표 11명 등 총 인원 103명은 1962년 11월 일본 주재 브라질 영사가 지정한 한국에 있는 병원에서 신체검사와 면접을 마친 후 브라질 입국 비자발급을 받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제 1차 브라질 농업이민 103명은 1962년 12월 18일 화란 선박 찌쨔렝카(Tjitjalenka)로 부산항을 출발하였고, 약 2개월의 항해 끝에 1963년 2월 12일에 브라질 쌍파울로(Sao Paulo)주 싼토스(Santos) 항에 도착하였다. 이민자들은 이미 지정되었던 농장인 싼토스의 “미라까뚜 베아2”농장으로 직행코자 하였으나, 지권이 불명확하고, 토착민의 반대로 입주하지 못하고 쌍빠울로 주립 이민수용소에 임시 수용되었다. 가족들과 이삿짐을 수용소로 옮긴 이민자들 중 일부는 즉시 별도의 자체 농장을 마련하고자 쌍빠울로 주에 있는 “자가례”농장을 구입하고 입주하여 “아리랑 농장”이라고 했으며, 일부는 “봉 수쎄소”농장을 임대하여 입주하고 “서울 농장”이라 했다. 그후에 뜻을 같이한 5세대가 “도나 까따리나”농장에 입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 1차 농업이민은 3개 농장으로 분산되었다. 그러나 토질이 다르고 기후가 다른데다가 한국의 소농 형식으로는 농사를 경작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교통도 불편한 벽지에서는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곤란했기 때문에 자녀들은 쌍빠울로(Sao Paulo)에 있는 학교에 입학을 시켜 공부를 시키고, 부모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중 살림을 하게 되었다. 자녀들이 커지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게되니 점진적으로 자녀를 따라 모든 가족들이 쌍빠울로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 브라질 정부는 한국정부에 통보를 하였는데, 농업이민으로 브라질에 들어온 17세대의 농업 이민자들이 정해진 농장에 입주하여 농사를 짓지 않고 거의 모든 이민자들이 쌍빠울로 옮겨왔으니, 이들을 모두 한국으로 소환해 가라는 통보를 하였고, 다시는 한국정부를 통한 이민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보사부에 이민 담당자인 오응서 씨를 브라질에 보냈고, 파견관이 이민자들과 브라질 정부와 협의하여 이민자 각자가 별도로 농지를 마련하고 정착하도록 결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민자 전원이 “아리랑농장, 서울농장, 도나까따리나농장, 이따깨라농장, 빠라나농장”에 분산 정착하므로 이민자 소환문제는 원만히 해결이 되었다. 한국 정부는 정부차원의 이민 예정지역 1차 답사를 위해 1963년 3월 23일에 해외 이민 주무 부처인 보건사회부 한국진 차관을 단장으로, 외부부 변훈 과장, 조기성 사무관, 오재희 사무관 그리고 한국 이민협회 한종만 회장 등 5명의 정부 사절단을 브라질에 보냈다. 정부 파견관 일행은 한.백 문화협회 정인규 회장과 임원들과 3월 24일부터 몇 곳의 이민 정착 후보지를 답사했고, 사절단은 브라질 외무성 차관을 만나 답사내용을 설명하고, INIC(브라질 농업개발성) 룩스 총재를 만나 답사목적을 설명하였다. 그때 룩스 총재는 “고이야스 북방지역”을 이민정착지로 권했으나 답사단원은 그 지역의 기후나 풍토가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아 정착하기에 적당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후보지를 찾아보기 위해 4월에 콰테말라로 떠났다.
제2차 친권 농업이민-1963년 11월에 브라질 정부로부터 이미 브라질에 도착하여 살고 있는 1차 이민자들의 친권초청을 허가 받은 24세대 150명이 싼토스항에 도착하였다.
제3차 농업이민-1964년 5월에 68가구 350명이 에스삐리또 싼또(Espirito Santo) 항에 도착했다. 그들이 서울에 있을 때 한국을 방문한 히바다바(Rivadaba) 대농장 주를 통하여 현금으로 농장을 구입해 놓았었다. 그러나 브라질에 도착하여 현지에 입주하였으나 계약 조건대로 영농정착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착농치 못하고 각자 분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