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시냇가)가장 행복한 가정(시128:1-6)
2016/05/20 03:15 입력  |  조회수 : 2,919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구글+로 기사전송 C로그로 기사전송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국가별로 행복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상위그룹에 속하는데 모두가 놀랐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국토개발이 거의 안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비가 오면 그대로 홍수를 당하는 나라입니다. 산업기반이 아주 빈약합니다. 문화시설, 기술문명, 모든 면에서 미개발국인 아주 못사는 나라로 정평이 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이라는 것은 소유입니다. 좋은 집을 소유하고 큰 사업체를 가진 자들을 향하여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소유와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은 소유하는데서 얻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의 의미
 우리 식탁에 먹을 것이 푸짐한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맛있게 먹는 것은 행복입니다. 입맛을 가지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그것은 행복입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침대를 방에 들여 놓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그 침대에서 단잠을 주무시는 그것은 행복입니다. 여러분, 불면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만 걸리고 노숙자만 걸리고 무식한 사람만 걸리는 줄 아십니까?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사람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푹신푹신한 좋은 침대위에서도 잠을 못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유와 행복은 다릅니다. 남이 못 가진 것을 가진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이 복을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거기에 행복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7절에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5절에는 “고난 받는 자는 그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절에도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놓고 잔치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 잔치가 곧 행복입니다. 행복하면 잔치분위기를 연상하면 됩니다. 이 잔치의 의미가 성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은 언제나 잔치 분위기 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잔치집 같은 가정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이 잔치가 곧 행복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용어입니다. 잔치집의 분위기를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잔치 집에 가시거든 항상 좋은 덕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잔치 집에 가서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조금 덜 반가 워도 “반갑습니다” 하세요. “잘 지냈습니까?” “건강이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인사하는 게 잔치 집에 가서 대화하는 예의입니다. 빤히 쳐다보고 “요즘 영 안 좋아 보이네요.” 잔치 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식 날은 신부가 조금 덜 예뻐 보여도 예쁘다고 하는 것은 원죄에 해당 안 됩니다. 제가 하객으로 가면 신랑, 신부 가족들에게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가서 신부 아버지를 보고는 “참 좋은 사위 얻으셨습니다.” 또 신랑 아버지를 보고는 반대로 “좋은 며느리를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고 하기 좋은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에 사탄이 좋아하는 말을 다 해소해야만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말이 우리 가정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의 대화 속에, 생각 속에, 우리들 삶의 모든 행위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잔치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의 가정들이 험악한 가정으로 되어 가느냐? 매스컴에서 가정의 달이라고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악마 같은 부모 이야기, 악마 같은 자식들 이야기, 아주 살벌합니다. 시편 9편 2절에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라고 했습니다.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성도의 영적잔치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복하신 그 행복이 내게 전달이 되어야 나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복이고,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데 내가 여호와의 그 행복을 전수받지 못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기뻐한다는 말은 주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나도 누린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기쁨을 누리시는데 그 예수님의 기쁨이 아닌 세상 기쁨을 찾고 있는 그것은 성도의 기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행복한 가정
 오늘 우리 사회의 위기 중 하나는 행복의 현재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행복은 지금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드 멜로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가까이 있는데 우리가 그 행복에 대해서 잘못 느끼고 있는 것은 집착 때문이다.” 행복은 가까이 있고 지금 내가 행복한데 이 행복의 환경과 여건과 방법과 조건에 자꾸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만해도 행복한데 ‘아니야, 나는 더 가져야 돼, 나는 더 높아져야 돼, 나는 아직 이것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 그 조건과 여건이 자꾸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낳아놓고 볼수록 귀엽고 아름답고 안 볼 때는 생각만 해도 귀여운 상태에서 애를 양육을 해야 됩니다. 애를 쳐다볼 때마다 ‘안 태어날게 나 가지고 왜 이래 속을 썩이나?’ 할 수 없어 키우는 그런 부모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이 극단적인 양면이 우리 사회에 지금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자식을 저주하면서 키우고 있는 부모가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도 이제는 짐이고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부모 공경이 이제는 짐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자식 양육이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상호 비극입니다.
 이 양면성이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행복의 현재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에서 행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 여러분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큰 복입니다. 그 복을 가지고 행복하십시오. 얼마나 더 가져야 행복하렵니까? 얼마나 더 조건이 갖추어져야 베풀고 선한 일을 하렵니까? 얼마나 더 있어야 불우한 사람에게 내가 자선을 하렵니까? 현재의 모습에서 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지금 행복해집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행복의 현재성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행복이 현재성을 잃어버리면 의무가 되고 집착이 되고 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복을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이 말은 복을 소유하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문맥은 복을 누리고 복을 나누고 베푼다는 뜻입니다. 복의 현재성을 말합니다. 복의 진행형입니다. 형통하다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지금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지금 형통하므로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의 가정이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네 집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아내, 푸른 감람나무 같은 자식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집, 이것이 가정의 모형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누릴 줄 아는 가정
 종교는 성격이 있는데 불교는 초상집이고, 유교는 제삿집이고, 기독교는 잔치집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이것은 의미가 맞습니다. 불교는 죽은 자를 집착합니다. 장례식을 아주 엄격하게 의식을 갖추는게 불교입니다. 극락장생 하라고 온갖 것을 다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라도 빠지면 죽은 자가 극락장생 하는데 장애가 될까봐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유교는 얼마나 제사를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조상 대대로 제사를 강조합니다. 그 집안에서 벼슬한 사람이 있으면, 몇 백년 대신이나 정승이 났다고 하면 오백년 고려조의 역사는 잊어버려도 그 집안의 정승을 한 조상은 안 잊어버립니다. 그만큼 제사를 강조하는게 유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죽은 자에게 얽매이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 잔치하는 집입니다. 어제 잔치한 집에 가는 게 아니고 오늘 잔치한 집입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 병든 행복관, 조건에 집착하고 환경에 집착하고 계속 더 가져야만 행복할 줄 아는 이 복의 중독증, 이것은 병든 행복관을 낳고 마는 것입니다. 복의 여건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지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여간 큰 복을 받은 상태가 아닙니다. 복을 못 받은 게 아니라 받은 복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 상태에서 행복하시면 되는데 행복의 수용성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온 가족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ammicj@hanmail.net
"남미복음신문" 브라질 유일 한인 기독교 신문(nammicj.net) - copyright ⓒ 남미복음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 많이본기사
  • 화제의 뉴스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정기구독신청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 남미복음신문(http://nammicj.net) | 창간일 : 2005년 12월 2일 | 발행인 : 박주성 
    주소 : Rua Guarani, 266 1°andar-Bom Retiro, São Paulo, SP, BRASIL
    기사제보 및 문서선교후원, 광고문의(박주성) : (55-11) 99955-9846 nammicj@hanmail.net
    Copyright ⓒ 2005-2024 nammicj.net All right reserved.
    남미복음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