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질: 표적과 고난(1)
퍼들글럼의 말대로, 만약 그들이 아슬란이 지시한 표적들을 잘 따라가고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확신할 수만 있다면, 이전에 그들이 얼마나 잘못했느냐, 또는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얼마나 크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일행이 막 그 사실에 대하여 확신할 즈음, 지하나라에서 만난 흑기사는 퍼들글럼의 통찰력과 아슬란의 표적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말에 대하여 정반대의 말을 한다.
“너희는 속은 거다. 그 말은 너희 목적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너희가 나의 여인님에게 묻기만 했다면 훨씬 좋은 조언을 해 주셨을 텐데. 그 말은 고대 시구에 있던 긴 문장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단어들이야. 나의 여인님께서는 아주 잘 기억하고 계시지. ‘내 비록 지금은 왕좌를 잃고 땅 아래 있으나, 내 사는 동안에는 온 땅이 내 아래 있었노라.’ 이것을 들어 보면, 고대 거인들의 한 위대한 왕이 그 자리에 묻히면서 자신의 자랑을 자기 무덤의 돌 위에 새겨 놓도록 한 것이 분명해. 그러나 돌의 일부가 깨지고, 다른 일부는 새 건물 때문에 옮겨지고, 또 자갈로 갈라진 틈을 메우고 하다 보니 현재 읽을 수 있는 글씨라고는 두 단어만 남은 것이다. 그 글이 너희를 위해 새겨진 것이라고 믿었다니, 이보다 더 기막힌 농담이 또 있을까?”
흑기사는 자신의 이 말을 통하여, 그 돌에 새겨진 글을 아슬란이 지시한 세 번째 표적이라고 믿는 그들의 믿음을 ‘기막힌 농담’이라 말하며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믿음만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글을 표적이라고 지시한 아슬란의 말을 비웃는 것이다.
1956년의 영화 『십계』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수 차례의 재앙이 지난 후 어느 날 바로가 모세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나일강이 붉어졌을 때는 나 역시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강 상류에서 오염된 붉은 흙이 떠내려와 그렇게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느니라. 이래도 그것이 너희 신의 권능이냐? 나일강의 오염 때문에 온갖 벌레와 해충들과 개구리와 역병이 유행한 것이 내가 너에게 준 그 지팡이 때문이었느냐? 그런 것들은 스스로 생겨났을 뿐이야. 신의 권능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우리 믿음은 흔들린다. 물론, 흑기사나 바로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흑기사나 바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과, 그 현상이 하나님께서 표적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며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퍼들글럼은 이것을 깨달아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이것은 사고가 아니야. 우리의 인도자는 아슬란 님이야. 아슬란 님은 거인 왕이 그 글을 새기게 할 때 그 자리에 계셨을 거고,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계셨을 거야.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일까지 모두.”
그렇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의 말과 사상과 현상이 우리 믿음을 흔들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 발생했을 때 거기 계셨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우리의 믿음을 흔들 때,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