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3:1-5]
오늘 본문은 제 구시, 지금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후 3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한글 성경 번역은 ‘성전에 올라갔다’라고 일회적으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모습을 계속 반복되는 습관적인 동사로 묘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매일 오후 일과를 시작할 때마다 먼저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17절에서 예수님은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 성전의 기능은 절기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무겁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끔 가는 곳이 아닌 언제나 열려 있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친밀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도 충만한 사람이고, 기도 충만한 사람은 주님과 교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자라”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향해 가고 있고, 그 시간에 구걸하기 위해 앉은뱅이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미문에 도착합니다. 미문은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 안의 첫 번째 장소인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의 출입구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걷지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앉은뱅이가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사람들은 그를 매일 성전 앞 미문 앞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앉은뱅이를 도와준 사람은 크게 2그룹입니다. 첫 번째는 매일 성전 미문에 데려다 주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이 앉은뱅이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을 보면 그 사람의 나이가 40세 정도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그는 사람들의 동정과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도움은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그는 습관대로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이 던져주는 동전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4-5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자의 영을 동시에 주목함으로 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만 교회는 연약한 자에게 시선을 줍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의 육신이 아닌 영혼을 주목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구제를 넘어 구원에 관심이 있습니다. 기도와 구걸의 차이점은 바로 바라보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구걸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죄와 허물로 망가지고, 쓰러진 연약한 사람들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시며 아파하셨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초청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그 시선은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성공을 바라보고, 명예를 바라보고, 문제의 해결만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그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기도함으로 우리의 눈에 주님이 찾으시는 한 영혼이 보이고, 그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