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뻬드로 뽀치(Pedro Poti)
네덜란드가 이처럼 신속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브라질 북동부 인디오들의 적극적인 협력이었습니다. 1625년 헨드릭츠 제독이 네덜란드로 데려간 쁘띠과라 족 청년 중 한 명인 뻬드로 뽀치는 레이덴 대학에서 개신교 신앙과 네덜란드 어를 배우고 1631년에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자기 부족의 귀족계급 출신이던 그는 귀국하자 마자 개신교 신앙과 신문물을 전하는 것에 힘썼으며, 네덜란드의 브라질 총독부와 함께 에스파냐에 대한 인디오 저항운동을 지휘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협력을 인정하여, 네덜란드 총독부는 그를 빠라이바(Paraíba)의 인디오 부족 대표로 임명하였고, 인디오 부족 총회의 대표들도 그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러자 에스파냐 측이 그에 대한 공작을 걸었습니다. 그에게는 펠리뻬 까마렁(Felipe Camarão: `camarão`이라는 성은 인디오 어로 뽀치 poty와 같은 뜻)이라는 사촌이 있었는데,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로마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에스파냐에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뻬드로 뽀치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어, 그가 만약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에스파냐 측으로 돌아선다면 큰 권력과 지위, 그리고 막대한 재화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뻬드로 뽀치는 단호하였습니다. “나는 너와 네 부족이 부끄럽다. 이 많은 편지를 내게 보내어 권하는 것이 결국 우리 사이를 이간하여 내 상관들을 배신하라는 것이 아니냐?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다른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는 너희들과 같지 않은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진리로 확신하는 신앙을 매일 실천한다. 만약 너희들이 저 교활한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종교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뻬드로 뽀치의 동족 선교는 결실을 맺어, 자신의 고향에 인디오 개신교회가 조직되었고, 1640년에는 이 교회당에서 신대륙 첫 인디오 어 성찬예배가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뻬드로 뽀치의 순교
선교와 정치, 그리고 군사분야에서 큰 활약을 한 뻬드로 뽀치는 1649년 2월 19일 뻬르넘부꼬의 과라라뻬스(Guararapes)에서 벌어진 제 2차 과라라뻬스 전투에 동족들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에스파냐 측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후로 약 3년간, 그는 팔과 다리에 늘 무거운 차꼬를 차고 그가 갇힌 지하감옥에서 매일 매우 비인간적인 고문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에스파냐 인들은 그에게 하루 한 개의 빵과 약간의 물만 주면서, 막대한 포상을 약속하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늘어놓기도 하면서, 그가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기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굳건한 그의 태도로 그들의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에스파냐 인들은 1652년에 마침내 그를 감옥에서 꺼내어, 사우바도르와 에스파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한 호송이라는 명목 하에 바이아로 보내는 배에 실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를 호송 도중에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사우바도르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인디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역사가들은 오늘날까지도 그가 사우바도르에서 에스파냐로 가는 도중 대서양에서 죽었다고 왜곡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