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순 권사(배우리한글학교장, 연합교회)
건강을 해칠만큼 무리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목이 쾨쾨하고 입술이 부르트고 심지어 몸 놀림조차 부드럽지 못하다. 밤 새 불편했던 몸을 정리라도 하듯 냉장고 문을 열고 생강차를 꺼내고 대추 알, 잣 알 서너 개씩 섞어 뜨거운 물을 붓고 나니 벌써 반쯤 몸이 풀린 기분이다.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고 하루의 일을 글로 시작해 본다. 글을 쓴다는 일이 때론 나의 독백이라면 몰라도 남에게 나를 간접적으로 알리는 일종의 정보의 역할도 하기에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 않는 인간의 심리로는 그다지 즐거운 일도 아니고 때론 귀찮은 일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아침, 휴일의 고요한 시간, 오롯이 나만의 시간 속에서 끄집어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일이라면 즐거운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넘치는 서고에 책들을 이제는 하나 둘 정리해야 한다고 매일 생각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변명 같지만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다. 수학 1의 정석, 앵무새 죽이기, 목자와 양..... 고개만 살짝 돌려도 다양한 책들의 제목을 보게 된다. 모두 기억은 못하지만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사연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니까 혹시 이런 사연 때문인가?
이민 3년만에 처음 한국 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해도 이민 가방을 소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귀하다는 김을 포함한 해산물은 당연히 물건 구입에 우선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보따리 속에 물건들이 바뀌기 시작해 교육이라는 글자만 있어도, 음악과 관련된 서적, 취미 생활에 꼭 필요한 책들은 필수라며 사들여 집에 쌓아 놓으니 어언 40년 동안 그 양이 어마한 거다. 얼마 전에도 선생님이 필요하실 것 같다며 학부모님이 만화로 엮은 동화책이 많이 있다고.... 필요하시면 드리겠다고....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있는 책도 다 못 읽고 또 조금씩 처분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이 노릇을 어찌하랴!
생각해보니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버리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게으름이 우선이요 괜한 욕심 때문이다. 언젠가는 쓸 수 있겠다는 헛된 생각으로 바라만 보다가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책이 어디 한두 권이랴! 기껏 겉 표지만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지.
고인이 되신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쓰인 주옥 같은 구절을 소개한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내 가족,내 책, 내 지성, 그리고 내 삶......’
‘죽음이란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유리그릇 같은 것....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 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코로나는 바로 그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을 안고 있는 우리 모습을 드러냈어......’
죽음 앞에서 한 치의 아쉬움 없이 당당하게 탄생의 자리로 간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이 아침 다시금 감동으로 밀려오는데..... 나는 무엇을 정리하며 이토록 죽음 앞에 의연할 수 있을까? 선물인 모든 것에 포함된 책도 내 것이라며 미련이 있는데..... 나의 서재에 있는 책 더미들을 허물고 또 허물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세상의 미련이 조금은 없어지게 될까? 얼마 전에 받은 표창장이 빽빽한 책꽂이 안에 비집고 들어가 또 자리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