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명 목사(나누리나누리선교회장)
프랑스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친구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골마을에 두 친구가 파리로 가서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자고 약속을 하고는 우선 파리로 가는 역마차 비용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된 날짜에 한 친구는 역마차 비용을 마련했는데 다른 친구는 마련을 못했다. 돈을 마련 못한 친구는 돈을 마련한 친구에게 “네가 먼저 파리로 가라 나는 역마차 비용을 만드는 데로 갈게. 네가 파리에 가면 어디 사는지 모르니깐 우리 매주 토요일 정오에 파리 에펠탑에서 만나기로하자”하니깐 한 친구가 “나 혼자는 안 간다. 네가 돈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자”하며 옥신각신 하다가 돈을 가진 친구가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하며 마차 마부에게 가서 “아저씨 우리는 친구인데요. 파리에 공부하러 가려고 하는데 여비가 한사람 밖에 없어요.” 그때 아저씨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한사람은 공짜로 태워 달라고? 그건 안 된다.” “아니에요” “여기 제 친구가 마차를 타고 저는 뛰어서 마차를 따라가다가 제가 힘이 들 때 아저씨 하고 부르면 아저씨가 천천히 가주시면 제 친구가 내리고 제가 탈게요. 아저씨 이렇게 교대해서 가면 안되요?” 마부는 아무말없이 두 소년을 바라보다가 “정말 그렇게 갈수 있겠냐” “그럼요” “저희들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졌거든요”
이렇게 해서 마차는 떠났다 마차가 얼마쯤 갈 때 마차를 따라가던 소년이 “아저씨”하고 부르자 마차가 천천히 가고 이 소년들이 서로 교대하면 다시 마차가 달렸다. 그때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이 소년에게 물었다 “저기 마차를 따라오는 사람이 누구냐” “친구예요” “그런데 왜 저렇게 계속 따라오냐. 너를 배웅 하는거냐” “아니에요” “우리는 한사람 탈 돈 밖에 없어서 서로 교대하며 타기로 했어요.” “파리까지?” “네” 그때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돈들을 내어 그 소년 마차 삯을 만들어 주어 파리까지 타고가게 했다. 두 소년도 따뜻한 친구이고 마차에 타고 가는 승객들 모두가 따뜻한 친구들이다.
친구는 누구인가? 나이가 비슷해야 친구인가 그건 아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친구이다.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친구이다. 내가 브라질에서 식당이나 브라질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때 “친구(아미고)”라고 부르면 아주 잘 대해 주었던 일들이 좋은 추억이 된다. 그럼 정말 따뜻한 친구는 누구인가? 내가 잘 될 때에 자기가 잘 된 것처럼 기뻐하는 사람이 정말 따뜻한 친구이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볼 때는 대부분 열심히 도와주지만 남이 잘되는 것을 볼 때는 특히 나하고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볼 때는 기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이 세례 주시고 증거하던자(예수)에게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할 때 세례요한이 29절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자는 신랑(예수)이다. 나는 그 신랑 (예수)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는 그분의 친구이다 그 분은(예수)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그분(예수)을 위해 쇠하여야 된다”하였다.
이처럼 내가 이런 따뜻한 친구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따뜻한 친구가 되면 된다.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정말 아파하며 위로해주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잘되면 정말 기뻐하며 감사하면 된다.
이번에 교회 옆으로 이사하면서 우리 대광교회에 형님 같은 친구, 누님 같은 친구, 동생 같은 친구들의 따뜻한 축하의 말과 선물을 많이 받아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 잊지 않고 감사하고 있다. 또한 지난 목요일에는 담임목사님과 박전도사님이 이사 축복 심방을 와 내가 매일 같이 부르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과 시편 112편의 넘치는 복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심을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이런 따뜻한 교회 따뜻한 친구가 있어 참 좋고 정말 “나는 너의 친구라”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