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목사(빌라델비아교회 담임)
[왕상17:12]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영적 측면 만이 아니라 약한 자나 환자들에 대한 관심과 육체적 돌봄(간호)과 치유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간호의 활동은 기독교적 사랑과 자애의 실천으로 강조되었는데 예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말씀 선포가 교회와 신앙의 삶에 영향을 끼친 결과라 할 수 있다.(마25:35-45) 기독교를 박해한 루시안(A.D 120~)은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서로 형제들이며 사랑하는 자들이며,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배려를 아까워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터튤리안은 대적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보살핌”이며, 자애의 실천에 있다고 했다. 초기 교부들은 보살펴 주고 간호하는 행위를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또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행해진 사랑과 자비의 사역으로 이해하였다.
기독인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는 요즘이다. 세상은 우리를 삼키려 하고 인생의 파도는 높고 수그러들지 않고 험하다. 주님의 배에 계심에도 “주무시기만 하느냐!”고 원망키 쉽다. 이 시간 동안 불평과 원망보다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그동안 온라인에는 온갖 정보, 취미, 막방방송 뿐 아니라 “사이 사이”, “구석 구석” 좋지 못한 내용을 포함한 방송들이 가라지처럼 자라고 있었는데 예배 말씀을 듣고 “찬송가 함께 부르기”, “말씀 묵상 나누기” 즉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훈련을 해 보도록 하자! 온라인 예배는 편하기는 하나 성만찬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 부활절 예배를 바라보며 환난을 이겨내도록 하자. 주님은 엘리야 시대 한줌 가루로 떡을 만든 여인을 말씀하신다.(눅4:25-26) 엘리야 시대는 믿음이 없는 시대 고난의 시대를 상징한다. 이 여인은 자식의 목숨을 위해 마지막 떡을 만들지 않고 이웃을 위해 떡을 만들었다. 고난이 축복이 되는 것은 고난에 처한 것을 원통해 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길을 갈 때만 가능하다. “마지막 한줌의 떡도 나눌 수 있는 성도가 되기까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