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설교요약)십자가를 믿으십시오-中
2019/06/13 09:18 입력  |  조회수 :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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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지혜가 있다고 하는 철학자들이나, 공부를 하는 학자들이나 세상에서 변론가들 즉 변증을 통해서 진리를 펼치는 헬라 철학자들 혹은 정치가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철학자들이나 지혜자들이나 학자들 그들이 ‘참 진리를 아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이 극히 제한적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세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늙어가는 지 정확히 아는 것은 없습니다. 요즘에는 특히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참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과거에는 사카린, 즉 당뇨가 있는 분들이 커피에 넣어 드시는 아도산치가 예전에는 암을 유발해서 안 좋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얼마 전까지 과자나 이런 것에 넣는 것을 매우 제한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설탕보다 낫다는 보고를 합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말을 하면 그것이 무조건 옳은 줄 알고 그 함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지역에 있던 수많은 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들은 학문적으로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진리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를 과학적으로 아무리 증명하려고 해도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명제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연약하니까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러면 심리적인 불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의 image 혹은 개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말들만 과학 혹은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자신이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좋은데,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무식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수많은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무식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논리에 빠져들고 말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이러한 과학적인 논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별 시원찮은 것 같은 ‘전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하고 설명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먼저 그 사실을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믿었고, 신약의 사도들과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고 증언하였습니다. 그 증언은 오늘도 전도라는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들도 내가 받음 복음, 내가 믿는 하나님을 그대로 누군가에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하는 것이 요즘에는 세련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사탄은 세련됨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구시대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철학적인 것처럼 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복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22~25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끊임없이 ‘표적’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기적 곧 표정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지혜 곧 철학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말 놀이에만 빠져 있어서 자신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표적과 철학적인 놀음을 할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표적과 철학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것은 미련한 것이고, 그렇게 쉬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 사람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쉬운 구원은 미련한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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