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목사(새소망교회)
“형통”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러한 형통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형통에 관한 많은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형통한 사람을 뽑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요셉”을 이야기 합니다. 왜 사람들은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요셉이 “꿈꾸는 자”였기 때문에 형통한 사람이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꿈은 형통한 삶을 이루는 원동력이며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에 꿈을 잃지 않으면 누구나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요셉이 온갖 고난을 겪지만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인생역전”의 모습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이런 요셉의 잘된 모습을 보고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인생역전으로 잘 되는 것” 이것이 과연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진짜 이유일까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형통-꿈꾸고, 인생 역전하는 형통-은 성경이 아닌 세상 속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해 매스컴 속에서 소개되는 잘 나가는 사람, 잘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형통함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은 무엇이 다를까요? 요셉의 삶을 통해 세상에서 말하는 만사형통과 성경 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통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형통입니다.
먼저 형통은 결코 사람이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형통은 하나님에 의해 ‘되어지는’겁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창26:24) 그들을 지켜주셨다고(창28:15)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형통하게 되어진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인 것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누명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결코 형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을 형통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비록 억울한 누명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형통한 사람이라 말씀합니다.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형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느냐? 입니다. 비록 환경적으로 시련 속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형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형통의 범위는 범사입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형통은 소위 말해 신앙생활, 예배생활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형통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복을 주시고, 어떤 것은 화를 주시고, 어떤 것은 형통하게 하시고, 어떤 것은 불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나님의 형통은 범사에 이루어지는 형통입니다.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요셉이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 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형통을 얻기 위해 잘 되는 일, 잘 되는 사람, 잘 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형통에 대한 삶의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형통함이 있음을 믿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셉은 이것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는 아주 믿음 좋은 분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삶의 모습을 보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더 불법과 편법을 행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진짜 형통한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참된 형통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통은 나의 옆 사람에게 이어지는 형통입니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게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종살이하던 집의 주인도 요셉이 형통한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자기 모든 것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꿈이 있어 그 꿈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나만 좋은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역전의 기회가 생겼지만, 그것이 나만 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을 형통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질병 가운데 고침 받거나, 문제 가운데 해결함 받게 되면, 복 받은 사람, 형통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는 형통함은 나만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 5절에.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 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는 어떠했습니까? 요셉의 형통함이 7년 기근을 준비하게 하고 7년 대 기근 때 애굽의 백성 뿐 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통은 나한테만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내가 형통하면, 내 주변도 내 가정도 함께 형통하게 됩니다. 내가 형통하면, 내 생업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형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형통의 복입니다.
여러분, 형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역대하 26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또한, 신명기 29:9에는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고 말씀 합니다. 형통한 삶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형통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반대로 예레미아 10장 21절에 보면 “목자들이 우둔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역대하 13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는 자는 결코 형통치 못함을 말씀합니다. 처음에 형통의 사전적 의미를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어 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형통의 의미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하나님의 형통을 구하시고,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형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잊지 마시고, 내 만족을 위해 하나님과 싸우지 마십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 그리고 모든 범사에 이루어지는 형통,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이어지는 참된 하나님의 형통이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