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9:32-43]
오늘 본문은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두 가지 기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잠시 사울을 만난 후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팔레스틴 서부 지역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여정 가운데 본문에서 베드로가 먼저 방문한 곳은 룻다였습니다. 룻다는 사론 평지 가까이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한 마을로,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가는 상인들의 길과 욥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요충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베드로는 팔 년 동안이나 중풍 병으로 침상에 누워있던 애니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애니아는 오랜 세월 동안 침상에 누워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던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병은 그녀에게 있어 절망과 고통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녀의 중풍 병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병은 ‘저주’가 아니라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병약한 삶을 살았지만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능력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애니아처럼 절망 가운데서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여러분에게 동일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34절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던 애니아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5절을 보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라고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니아의 치유됨을 보고 주님을 찬양했고, 영원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던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능력을 베푸시는 이유는 영혼 구원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룻다에서 16km떨어진 욥바로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들려온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비다(암사슴)’였고 그리스어로는 ‘도르가’였습니다(36절). 우리는 본문에서 도르가의 죽음을 통해 눈여겨 볼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죽음 뒤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도르가가 죽자, 그녀가 생전에 섬겼던 과부들이 그녀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칭송합니다. 이처럼 우리에 대한 평가도 도르가처럼 죽음 이후에 사람들 앞과 주님 앞에서 내려질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비다(도르가)의 상황은 애니아의 상황보다 더욱 절망적입니다. 병든 것도 아니고 이미 이생에서의 삶이 끝나버린,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욥바의 성도들은 죽은 이를 살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고, 베드로 또한 그 절망의 소식을 듣고서도 욥바로 달려갑니다. 지금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가 아닙니다. 한번 설교하면 3,000명, 5,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룻다에서는 8년 동안이나 중풍 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고쳤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다비다의 죽음을 보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40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그 결과 룻다와 사론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이 주께로 돌아왔고, 욥바에서도 많은 자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요, 참된 사도였음을 4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무두장이란 죽은 동물의 가죽을 취급하는 부정한 직업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남편이 무두장이 일을 시작하면 아내가 이혼을 청구해도 된다는 법이 있을 만큼 멸시받고 천대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가 유숙합니다. 그는 세상의 환호와 박수와 대접을 뒤로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만이 높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에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