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관용의 삶
2017/12/07 03:3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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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빌 4:5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저 사람은 관용의 사람이다.”라고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살라는 말씀이다. 관용의 사전적 의미는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마음이 너그럽다. 마음이 넓다. 관대하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잘잘못, 시시비비를 세세하게 따지지 않고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통 크게 받아주고 넘어가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가 관용하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관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끼리 서로 관용의 자세로 대하여야 가정이 평안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관용함으로 대해야 한다. 부부간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관용함으로 대할 때 가정이 평안하게 된다. 그런데 관용함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만 좁은 마음으로, 옹졸한 마음으로, 까다롭게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랑이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관용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대할 때 그곳에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성도인 우리는 관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한다. 모든 사람은 믿는 자만이 아니라 불신자들 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신 불신 간에 관용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알게 하라”고  말씀한다. 인정을 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이 성도인 나를 보고 “아무개는 관용의 사람이야.”라고 알아주도록, 인정하도록 살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성도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관용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고 만다. 가인이 바로 그런 자였다. 창 4: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니까 그만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고 말았다. 가인의 이러한 행동은 바로 관용이 없는 옹졸한 마음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이 관용의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악을 행치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관대한 사람, 넓은 사람은 절대로 그런 옹졸한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축하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옹졸하니까, 그와 같이 범죄의 자리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또한 옹졸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어린 동생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요셉의 형들은 관용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결국 그러한 그들의 옹졸함, 치졸함이 사랑하는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려고 했고, 짐승처럼 돈을 받고 노예상인에게 팔아먹는 악한 형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관용의 마음이 없으면, 이처럼 사람이 비열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전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관용의 마음은 이처럼 중요하다. 그런 반면에 관용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보면 요셉을 들 수 있다. 형들이 그처럼 옹졸한 마음으로 자신을 미워, 시기, 질투해도, 그는 그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본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노예로 팔아먹었어도 그 일로 인하여 옹졸하게 형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여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처럼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게 하면 똑같이 나쁘게 응대해야 한다. 그런데 요셉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의 마음은 넒은 마음, 관용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형들을 모두 용서하고 원수를 갚지 아니한 것을 본다. 우리도 요셉처럼 관용의 삶을 살기를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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