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교회에 부임하니 말 그대로 농촌 미 자립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예배당 건물은 블록 벽돌로 건축한 24평정도의 낡고 작은 건물이었다. 그 결과 겨울에는 예배당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서 어찌나 추운지 예배를 드리는 것도 힘들고 새벽기도회 시간에 추워서 기도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름에는 냉방시설이 안되어 있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사택은 9평정도 되는 스레트 지붕의 블록 건물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역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지붕의 스레트가 한낮에 열을 받아서 저녁에 9시가 넘어서야 겨우 방안에 들어올 정도였다. 한낮에 방의 천정을 손으로 만져보면 천정 합판이 뜨거울 정도로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낮에는 옆에 있는 소나무 밭에 가서 피신을 해야 했고, 밤 늦게서야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쥐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녁만 되면 천정에서 운동경기를 하는지 계속 우르르 몰려다니기도 하고, 천정 모서리에 구멍을 뚫어 놓고 방안을 살펴보기도 하고 벽을 타고 잽싸게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쥐들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런 상항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성도들의 집회 현황은 장년 성도 20여명이 회집하고 있었다. 물론 당회가 구성되지 못하였고, 안수집사 2명 권사 2명, 그 외 서리집사 몇 분이 교회 일군이었다. 그리고 교회 재정상황도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 그동안 교회에서 목회자 사례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 충당을 해오고 있었다. 노회에서,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그 외에 여러 교회에서 조금씩 지원을 받아서 사례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교회 자체적으로 헌금이 나오지를 아니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지원하는 교회나 단체에서 직접 현금으로 지원금을 전달을 해 주었다. 따라서 어떤 때는 목회자가 직접 가서 돈을 수령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몇 달씩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돈을 수령하려고 갈 때는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었다. 교회가 소속한 노회 회의록에 생활비를 지원 받는 교회 명단에 항상 소개 되었다. 그러니 그 교회 목회자로서 항상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무시를 하지 않았겠지만 본인은 항상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교회 형편이었는가 하면 노회에서는 미 자립 교회 목회자 생활비 보조는 어느 정도 지원한 다음에는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들이 정신을 차려서 자립하게 된다. 언제까지 무작정 지원을 할 수 없다. 라고 결정을 했으나 봉곡교회 만은 예외로 예수님 오실 때 까지 목회자생활비 보조를 해주어야 한다. 라고 결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자립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교회 형편이었다. 부임 당시 교회에서 한 달 사례비를 35만원을 세웠다.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지원을 받아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형편이니 교인들의 사고방식은 대부분 우리 교회는 어려운 교회이다. 그러니 감당을 못한다. 여전도회 연합회 같은 모임에서도 우리교회는 감당을 못한다. 도와주어야 하는 교회이다.라고 한마디로 거지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좁은 교회 마당에 잔디를 심어 그 잔디를 채취해서 팔아가지고 교회 재정에 수입을 잡아서 사용했으니 어느 정도의 형편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도들 중 십일조를 드리는 성도가 불과 2, 3명 정도였고, 그것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십일조만을 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1년 예산이 천 여 만원에 불과 했던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