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질: 표적과 고난(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참된 믿음을 비웃던 사람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이름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초대 교회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그랬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던 다소의 사울이 갑자기, 자기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교회 예배 때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다(행 9:26).
유스터스와 질과 퍼들글럼의 믿음을 농담으로 치부하던 흑기사에게 발작이 찾아와 그들에게 “위대한 사자 아슬란 님의 이름에 맹세코 부탁하노라” 하였을 때, 그들은 순간 당황했다. 그런데 또한 바로 그것이 아슬란이 말해준 네 번째 표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 했다.
흑기사의 말을 들은 퍼들글럼이 소리쳤다. “표적이다!” 질이 말했다. “아, 이제는 어떻게 해요?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이에 퍼들글럼이 대답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어.” 그러자 유스터스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저 사람을 풀어주기만 하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이에요?” 이것은 자연스러운 걱정이다. 만약 은의자에 묶이기 전에 흑기사가 부탁한 것을 어기면 그가 그들을 죽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 때, 퍼들글럼이 빛나는 말을 한다. “그건 나도 모르지. 아슬란 님은 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 질이 해야 할 일만 말씀해 주셨을 뿐이지. 저 친구는 풀려나기만 하면 우리를 죽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표적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그렇다. 누가 미래 일을 모두 알 수 있겠는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먼저다. 그러나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 바로 아슬란이 준 표적이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것을 따라가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확고하게 아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그 증거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면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이것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신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감격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힘겨운 세상살이 속에서 비치는 한 줄기 하늘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방 잊어버리고 또다시 힘들어한다.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 삶이 앞으로 잘 될지 그렇지 않을지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미래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은 가중된다.
이 때 우리는 잠시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오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분명히 무수한 증거를 보여주셨다는 것을. 일의 성패를 알지 못할 때, 앞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두려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하나님의 인도와 표적을 따라가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