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질: 절대주권적 구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이 선택의 문제인양 생각하려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선택하시고자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 5).”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난다’, 즉 ‘태어난다’는 단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태어났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 즉 ‘거듭’ 태어나는 것도 우리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는 한,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거듭남의 증거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우리의 선택일까? 아니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유 3절).”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조차도, 그것은 단번에 ‘주어진’ 것이라 가르친다.
아슬란이, 아무도 그들을 나니아로 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질에게 하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희도 나를 부르지 않았을 게다.” 나니아의 창조주가 자신의 세계로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유스터스나 질이 아무리 그곳으로 가고 싶다 하더라도, 아슬란이 들어가게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아슬란과 나니아를 위하여, 그들이 그곳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행방불명된 나니아의 왕자를 찾아 왕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기시고, 죄책이라는 끔찍한 멍에의 무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 11:28-30).”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로운 짐을 벗겨 가시고, 그 자리에 ‘주님의 멍에’라는 것을 주시며 주님께 배우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시는 멍에란 바로 ‘자기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