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흔히 정열의 나라라고 불린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투우(bull fighting)로 관광객을 모으고 정열의 춤 플라멩코로 유명한 나라다.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게르니카’로 유명한 피카소,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있는 축구의 나라, 그리고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겐 이 나라의 수호성인이 된 사도 야고보의 성지에 더 관심이 많다. 야고보 사도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가 있는 나라다. 바티칸은 스페인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제3대 성지로 인정하고 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란 말이고 ‘꼼뽀스뗄라’는 많은 별이라는 뜻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비행기나 버스가 아닌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길, 그 길을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즉 ‘성 야고보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겐 이 나라의 수호성인이 된 사도 야고보의 성지에 더 관심이 많다. 야고보 사도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가 있는 나라다. 바티칸은 스페인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제3대 성지로 인정하고 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란 말이고 ‘꼼뽀스뗄라’는 많은 별이라는 뜻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비행기나 버스가 아닌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길, 그 길을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즉 ‘성 야고보의 길’이라고 부른다.
바르셀로나 태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전 국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있다. 사마란치는 스페인어 이름이 아니라 까딸루냐어 이름이기 때문에 사실은 ‘사마랑’이라고 적어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스페인어로 하면 호안 미로지만 까딸란(까딸루냐의 언어)으로 발음하면 조안 미로가 되는 것이다. 미로는 여기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파리, 뉴욕 등지를 돌며 초현실주의란 회화의 한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올림픽 공원이 있는 몬주익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미로 미술관은 이 나라의 건축가이자 미로의 친구였던 조셉 루이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1975년에 건축된 것이다.
조안 미로와 초현실주의
미로는 1893년 바르셀로나 지방의 귀금속 공예를 하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즈니스를 하라던 부모의 희망 때문에 경영과 미술을 병행하여 공부해서 2년간 회계사로 일한 적도 있다. 그러나 화가의 길을 원하는 아들의 희망에 굴복하여 결국 부모는 화가의 길을 허락했다. 당시 야수파, 입체파가 유행하던 시기에 그의 화법은 별로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1920년 미로는 처음으로 파리에 진출하면서 같은 바르셀로나 출신인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하여 당대의 유명 화가들을 만났다. 1924년 초현실주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레톤의 초현실주의(Surrealism)에 합류했으나 그와는 다른 고유한 세계를 추구했다. 스페인을 휩쓴 프랑코의 독재정권을 피해 타국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초현실주의는 ‘억압’에서 진화하게 되는 바탕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게 되었고 초현실주의 작가 중에서도 그의 작품만이 가지는 함축성 때문에 자유롭고 독특한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던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대체로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폭력과 비극으로 점철된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그림 속에 표현하기도 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가장 독자적이고 조형적인 특징으로 인해 그의 그림을 보면 바로 그 작가가 미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안 미로는 강렬한 선과 색의 드로잉과 채색을 특징으로 하여 마치 암각화나 고대의 그림문자를 연상시키는 별, 여자, 새, 달 등 단순한 기호와 형태를 어린아이가 놀이하듯 표현했다. 자주 인용되는 미로의 유명한 말 중에는 ‘회화의 암살(assassination of painting)’이란 말이 있다. 즉 그림의 전통을 없애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려는 그의 ‘창조적 의지의 선언’인 셈이다. 그는 또 “단순함이 곧 자유함(simplicity is freedom)”이란 유명한 말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로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그의 조각과 드로잉 및 그림이 전시되었고 1950년에 하버드 대학교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도예에 대한 시도는 파리 유네스코 건물의 대형 벽화에서 절정을 이뤘고 1962년에 파리는 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의 미로 작품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 중에는 시카고와 휴스턴을 위해 제작한 대형조각을 비롯해 여러 점의 기념물들이 조각되었고 1980년에는 스페인의 미술부문 황금훈장을 받은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마드리드의 한 광장에 ‘미로 광장’이란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미로는 사회나 유행하던 예술론의 저항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완고하게 자신이 추구했던 미술 세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또한 그는 근면하고 집요하게 그만의 세계를 추구해 왔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그림에서는 그의 열정과 꿈, 희망과 자유가 느껴지는가 보다. 관광 가이드 북에는 미로의 미술을 감상하는 팁을 주고 있다. “그림을 보고 감상을 하라. 그리고 그림의 타이틀을 읽어라. 타이틀을 염두에 두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라.” 나도 언제부터인가 미로의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선물 하나를 들고 집에 왔다. 내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다. 미로의 ‘블루’란 작품이었다. 푸른 바탕에 검은 점이 이어지다가 강렬하고 선명한 빨간 붓자국이 화폭을 가로지른다. 그의 유명한 그림들은 수없이 복사되어 선물가계에서도 쉽게 발견할수 있다. 집에 걸려있는 그 그림을 보면서 몬주악 언덕 중턱의 미로 미술관을 회상하곤 하다.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