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성 목사(브라질선교교회 담임)
유권사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야외예배를 갑니다. 일 년에 한번 혹은 두 번 정도 가는 야외예배는 다른 주일에 비해서 예배보다는 놀 거리, 볼거리에 더 신경을 쓰는 예배입니다. 옷도 활동적인 것을 입고 야외로 나가 자연과 함께 하는 그런 예배입니다. 젓가락 두 개만 가지고 가도 먹거리 음식이 풍성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예배입니다. 돌아갈 때는 상품과 선물까지 받는 기분 좋은 예배입니다. 이번 주일 야외예배는 어린 학생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신앙생활의 이정표 같은 역할을 감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보니 갑자기 지긋지긋했던 이와 벼룩생각이 났습니다.
이와 빈대, 어린 시절 사라진 추억 찾기
저와 부모님이 함께 살던 시기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불과 14년에 불과했습니다. 내일모래 고희(古稀)을 바라보면서 고작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가 전부입니다. 시골, 강화도의 화도초등학교. 전교생이 600명 남짓한 한 학년이 두 반씩이었던 초등학교는 제 인생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머릿니가 기어 다니며 허연 서캐가(이의 알) 머릿속에 그득한 채 다니던 학생들이 많던 시절입니다. 저녁에는 어머니들이 서캐흝이(서캐훌치, 서캐를 훑어 내는 데 쓰는 살이 가늘고 촘촘히 박힌 참빗)로 가려움과 싸우는 아이들을 돕던 시절입니다. 너무 지독한 번식력과 퇴치되지 않는 전쟁으로 급기야는 디디티라는 농약으로 이를 퇴치하는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양지바른 곳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어서 서캐를 잡는 것은 정겨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상고머리를 깎던 시절 머리에 서캐와 머릿니가 감당이 안 되면 겨울 방학 때 한 번씩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곤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강화도에서 인천으로 유학을 와서 하숙을 하며 공부했습니다. 시골에서 보던 머릿니가 아니라 옷 솔기에 살면서 출몰하는 몸 이가 사람을 괴롭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옷을 무명천 소재로 사주셨고 빨래까지 해주던 하숙집에서는 무명천 옷을 삶아 빠는 그런 방식으로 관리해주셨던 생각이 납니다.
추억의 내용은 다르지만 ‘부모와 함께’는 공통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우리 모두를 떠났고 이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연탄가스에 약해서 없어졌다는 설도 있고, 디디티에 녹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신학대학생 때는 100년도 더된 목조건물 기숙사에 빈대가 출현했습니다. 공동방재를 하고 과학적인 관리를 했지만 빈대잡기 위해 초가(草家)삼간을 태울 수는 없어 대학당국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거기 사는 우리는 잦은 빈대 출몰로 “초가삼간이 다 타도 빈대죽은 것만 시원하다”는 속담을 되 내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권사님, 이제 50년을 돌아보며 “아! 옛날이여” 하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문둥병이 인류문명에서 사라지듯, 우리네 일상에서 이와 서캐 그리고 빈대는 요즘 아이들이 모르는 단어, 어른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나 남아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일은 야외예배입니다. 시대마다 경험은 다르지만 부모님과 함께 드리는 야외예배는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꺼내 추억하고 좌표를 수정해 언제나 믿음의 대열로 돌아오는 어린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