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의 문화탐방)나니아 연대기: 구원 그 이후 33
2024/08/03 02: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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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샤스타: 자유와 방종(1)

 연단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될 수 없다. 아무리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직도 죄의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 세상적 생각, 이 세상적 감정, 이 세상적 욕구를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아 자유를 얻은 사람이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자유는 필연적으로 방종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주님께서 버리라고 하는 것들이 무겁게 짓눌러, 영혼을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샤스타는 칼로르멘 군대가 아첸랜드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칼로르멘 땅을 벗어나는 길이니까, 모두들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갈수록 여행 속도가 느려졌다. 칼로르멘 땅이 사막이라서 낮에는 불볕더위, 밤에는 극한 추위가 어렵게 만든다는 점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사막 가운데 발견한 작은 폭포수 주변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그만 푹 골아 떨어져 버린 것이다. 해가 벌서 중천에 있을 때, 아라비스가 깼다. 그리고 친구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브리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풀이라도 한입 먹어야 할 거 아냐.” (…) “아니, 왜 이렇게 서둘러? 우리는 이미 사막을 건넜잖아.” (…) “나는 빈속으로 갈 수 없어.” 

 그러자 나니아의 암말인 휜이 무척 수줍게 말을 꺼냈다. 

 “저…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나도 당신처럼 이대로는 못 갈 것 같아요. 하지만 말이 (박차 따위를 단) 사람을 태웠을 때, 아무리 지금 같은 상태라도 어서 가라고 하면 가지 않던가요? 우리, 그러는 거 많이 봤잖아요. 그러니까… 으응… 우리는 자유로운 말들이니까 훨씬 더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다 나니아를 위한 일이잖아요.” 

 그렇다. 우리는 흔히 ‘자유’라는 것을 ‘나 좋을 대로 행동하는 허가증’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자유는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발성과 적극성, 무엇보다 용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의 의미는 그 반대인 - 그리고 자주 부정적인 의미로 소환되는 - ‘노예근성’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다. 

 “사실 휜의 말이 옳았다. 만일 타르칸이 등에 올라타고 계속 가라고 명령했다면, 브리는 힘든 길도 몇 시간씩 잘 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노예로 있었거나 억지로 시키는 일만 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처럼, 브리는 강압적으로 시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스스로 하려고 들지 않았다.” (『나니아 연대기』 제 3권 「말과 그 소년」 159쪽)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로 구원을 받아 자유롭게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발적으로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구하려 하지 않고, 그 말씀의 원리 원칙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그 말씀의 요구를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려 하지 않고 구현하려 하지 않는 이는, 유감스럽지만 아직도 신앙적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방종이다. 또한 영적 게으름이다. 주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섭게 추궁하신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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