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복 목사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승 간 흥부 내외와 놀부 내외가 염라대왕 앞에 섰습니다. 이때 염라대왕이 말을 합니다. “흥부와 놀부는 들어라. 지금 너희들 앞에 똥통과 꿀통이 있느니라. 각자 어느 통에 들어가겠는고?” 놀부 잽싸게 먼저 말합니다. “저는 꿀통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염라대왕이 말을 합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놀부는 꿀통에 그리고 흥부는 똥통에 들어갔다가 나오너라.” 두 사람은 염라대왕이 하라는 대로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염라대왕 또 말을 합니다. “너희 형제는 서로 마주 서거라. 그리고 서로 상대의 몸을 깨끗하게 핥아라.” 놀부는 죽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꿀통에 들어가는 것은 좋았는데 서로의 몸을 핥으라니 말입니다.
다음은 그의 아내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합니다. “흥부 아내와 놀부 아내는 각자 어느 통에 들어갔다 나오겠는가?” 놀부 아내는 순간 놀부를 쳐다 봅니다. 그때 놀부는 아내에게 똥통에 들어가라는 눈짓을 합니다. 놀부 아내가 번쩍 손을 들더니 “대왕님~ 저는 똥통에 들어가고 싶어요.” 대왕이 말합니다. “오! 그러냐! 하는 수 없지. 놀부 아내는 똥통에 그리고 흥부 아내는 꿀통에 들어갔다가 나오너라.” 두 여인은 염라대왕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때 염라대왕이 말합니다. “지금부터 흥부와 놀부는 각자 자기 아내 앞에 나와 마주 서거라. 그리고 각자 자기 아내의 몸을 깨끗이 핥아라.” 불쌍한 놀부, 드디어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을 일절 생각해 주지 않고 오직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놀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똥 맛을 제대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음을 잘 못 씀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트로트 가수인 구자억 목사의 노래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좀 잘하자. 조금만 더 잘하자. 더이상 주님의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마라. 우리가 좀 잘하자. 좀만 더 잘하자. 우리가 얼마나 멋진 분을 따르는지 삶으로 보여주자. 싸우지들 말고 주님의 삶을 생각해 보자. 그분이 높이 오르려 하셨는가? 욕심 그만 부리고 주님의 삶을 묵상해보자. 그분이 더 가지려 그렇게 애쓰셨는가? 우리가 좀 잘하자. 정말로 잘하자. 우리가 얼마나 멋진 분을 따르는지 삶으로 보여주자”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못하고 살면 이렇게 ‘우리가 잘하자. 조금만 더 잘하자.’라는 권면하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목사인 내가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하고 삽니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이 칭찬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이 보기에는 기독교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잘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니 조금만 더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조금을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욕을 먹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1%만 변화하자. 1%부터 시작하자고 말이다. 그 1%가 2%가 되고 10%가 되어간다면 참 많이 변화되어 있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더 잘하면서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 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남편에게 대뜸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해? 사랑해?” 남편이 당황해서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뭐가 다른데?” 그때 아내가 의기양양해서 차이점을 설명합니다. “응 자신이 즐거워서 상대방에게 뭔가를 해 주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즐겁게 하려고 뭔가를 실천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야.”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누가 즐거워서 하느냐? 인 것입니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즐겁고 행복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가 좋아야 하고 내가 기쁘고 내가 행복해야만 합니다. 남이 즐겁고 남이 기쁘고 남이 행복해하는 것을 눈 뜨고 보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시기 질투가 생깁니다.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거짓입니다. 기만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좋아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행하는 그 일들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움을 주는지 말입니다. 나만 기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움을 당하고 상처를 받겠습니까?
요한복음 13장 35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우리끼리라도 서로 사랑하면서 상대방을 즐겁게 해 주는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상대방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로 사랑 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행복하게 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의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 봅시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아멘! 할렐루야!
(YouTube : 강성복목사 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