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22
2022/06/23 02:0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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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네덜란드령 브라질의 개신교회

 네덜란드 연합공화국의 국교는 개신교 교단 중 하나인 개혁교회였습니다. 1624년에 한 곳이었던 개혁교회는 1630년에 두 곳이 되었습니다. 그 후 브라질의 식민지화가 진행됨에 따라 유럽의 개신교인들이 자유를 찾아 뉴 네덜란드로 이민을 왔고, 이들을 보살필 목사들이 브라질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인 교단이었습니다. 식민지화가 막 시작된 단계에서는 주로 유럽 이민자들을 상대로 사역이 진행되었지만, 헤씨피와 올링다에 여러 교회가 세워진 후로는 포르투갈인 전도와 흑인 및 인디오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본국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파송되었습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로마 카톨릭의 핍박을 당하여 해당 지역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고, 어떤 이들은 에스파냐 군에 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식민지의 주요 도시에서 지속적인 선교사역과 교회개척사역에 힘쓴 결과, 1636년 12월에 헤씨피에서 개신교회들의 지역 회의인 노회를 조직하기에 충분한 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대륙 최초 개신교 노회 조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브라질 노회’ 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 6년 후인 1642년에는 브라질에 벌써 22개의 개혁교회와 이들을 섬기기 위한 50여명의 목사들과 25명의 장로들, 그리고 고아들과 과부들 및 병자들을 돌보는 100여명의 집사들이 있어서, 하나의 노회로 계속 존재하기에는 행정업무와 처리속도 및 비용이 부담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년 전에 세워진 ‘브라질 노회’를 ‘뻬르넘부꼬 노회’와 ‘빠라이바 노회’로 나누고, 다시 이 두 노회가 식민지의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상위 회의인 ‘브라질 대회’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가히 기하급수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배경에는 에스파냐의 압제와 에스파냐가 파송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이 ‘브라질 대회’는 1642년부터 1646년까지 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브라질 선교정책

 네덜란드령 브라질의 개혁교회 노회들은 본국에 목사들을 파송해달라는 청원을 수시로 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선교정책이 목회와 선교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따로 있고 선교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647년까지 본국에서 파송한 54명의 목사 중 약 19명이 선교사역에 직간접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브라질의 개신교회는 이렇게 목회자 파송 청원을 한 것만큼이나 서인도회사에 지속적으로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사역의 초점이 목회자들의 설교뿐아니라 교사들의 개신교 교육에도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브라질을 단순히 종교적 선교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문화선교의 대상으로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도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도회사가 파견한 11명의 교사들은 모두 교회에서 주일성경학교 교사로 사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방면의 선교는 매우 빠르게 결실을 맺었습니다. 네덜란드 선교 30년간, 그들은 네덜란드 어와 포르투갈 어 및 라틴어에 능통하여 차세대 목회자와 교사로 섬길 수 있는 수많은 인디오 청년 인재들을 배출해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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