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요한 마우리츠 판 나싸우-지겐(Johan Maurits van Nassau-Siegen)
네덜란드가 당시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브라질을 침공한지 13년이 되는 1637년,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정부는 남아메리카의 신생 식민지를 ‘뉴 홀란트’ 라 명명하고, 그때까지 군인 출신 총독을 임명하던 것에서 군 경험이 있는 정치가 출신 총독을 선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네덜란드령 브라질이 군사적으로 점점 안정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렵 식민지 인구가 9만 명을 넘어서자, 군사적 안전보장과 공공치안보다 행정과 경제, 그리고 민사가 더욱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총독은 개신교 신자로, 군사에 문외한이면 안 되었고, 뛰어난 행정 능력과 경제기획 능력, 그리고 민사 쟁의에 대한 깊고도 현실적인 안목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 인물을 물색한 결과, 네덜란드 연합공화국은 요한 마우리츠 판 나싸우-지겐 백작을 적임자로 선정하였습니다. 그는 1604년 네덜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당시 개신교 학문의 총본산인 스위스 제네바와 바젤에서 법학을 공부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1621년, 그는 30년 전쟁에서 네덜란드 군 기병대에 입대하여 로마 카톨릭 측의 에스파냐를 상대로 싸운 성 요한 기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네덜란드 군대에서 계속 활약하여, 1629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일원으로 해상무역과 경제활동의 원리와 실무에 대해 잘 이해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영지에 학문과 예술진흥을 위한 문화원도 지은 인물이었습니다.
1636년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정부가 그에게 브라질 총독 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곧 수락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법률적 기지를 발휘하여, 99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브라질 통치헌장’을 작성하여 공화국 정부와 서인도회사의 즉각적인 승인을 받았습니다. 브라질 총사령관과 총제독의 지위까지 받아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1636년 10월 25일 유럽에서 출발하여 이듬해인 1637년 1월 23일에 브라질 헤씨피에 도착하였습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 답게, 여행 도중 배 안에서 그는 기도시 몇 편을 작시하였고, 헤씨피 도착 당일에는 헤씨피 개혁교회 목사에게 부탁하여 그날 모인 회중과 함께 브라질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뽀르또 까우보 탈환
브라질에 도착한지 일주일, 나싸우 신임총독은 육군 3천명과 해병 8백명을 소집하고, 혹시 있을 매복을 대비하여 예비대 6백명을 편성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목적지는 오늘날의 알라고아스 주의 뽀르또 까우보, 바로 깔라바르 대위가 순교한 도시입니다. 총독은 이 한 번의 전투로 네덜란드에게 큰 도움을 준 개신교 형제 깔라바르 대위의 복수와 저하된 군 사기의 고무,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 공략이라는 세 가지 주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군은 육지와 해상 양면으로 행군하여 2월 18일에 뽀르또 까우보를 포위하였습니다. 성은 바뉴올리 백작이 지휘하는 에스파냐 육군 1180명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네덜란드 측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나싸우 총독의 풍부한 군 지휘 경험과 충실한 장비, 수적 우위와 무엇보다 복수전이라는 명분이 이룬 승리였습니다. 깔라바르 대위의 순교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