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색의 마음은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의 동화<<어린 왕자>>에서, 사막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마음처럼 얄궂은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선지자 에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런대로 속내를 감추고 살아갈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은 “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자신의 행방을 찾느라 종일 방안을 맴돈다”하였습니다. 갑자기 밀려들어 온 번거로운 생각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도 내 속을 알다가도 모를 때가 많으니까요.
형체도 없는 창해일속滄海一粟같은 마음이 온 우주를 품은 듯, 넓고 깊은 세계를 넘나들며 범사에 그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바람에도 흐느끼는 다스릴 수 없는 갈대 같습니다. 빗물에도 추적추적 젖어 들고, 스쳐 가는 설움에도 시름들이 저미다가, 저 혼자 뜬구름처럼 떠돌아다니고 싶어 합니다. 한번 방황이 시작되면 잦아들 줄 모르는 물안개로 피어올라,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과 헛헛함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몸서리치도록 잔인한 노스텔지어 속으로 끌려 들어가, 바로크 시대에서, 팝송으로, 가곡에서, 가요로, 민요에서, 성가로 장르를 초월한 음악의 늪에 풍덩 풍덩 빠져 자맥질을 합니다. 지독하게 아리고 슬픈 음률들이 몇 날이고 가슴팍을 에우며 눈물 강을 헤매게 하지요. 그러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면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마실 간 마음을 다잡지 못하면 부질없는 글을 쓰고 또 쓰며, 수만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왜? 퇴색한 이 질문도 곰삭아버릴 만한 세월이 지났건만, 기회만 되면 제 자리로 돌아와 예리한 칼날을 세웁니다. 여러 달 참 야무지게 끌려다녔습니다. 아니 차라리 아리고 짜릿한 감정을 따라 낯선 거리를 헤매며, 슬픔이 조약돌처럼 달아져 가는 것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 건너갈 수 없는 그리움의 강에 발을 담그고, 바람처럼 물처럼 흐르고 싶어 하는 영혼의 알싸한 설움을 눈물샘에 담았습니다.
이제는 이 깊은 미로迷路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여기쯤에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또 하나의 나와, 아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빠져 있고 싶어 하는 내 안의 내가 싸우는 동안, 원도 한도 없이 음악을 듣고, 책도 읽고, 시詩를 씁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잡은 손을 놓고 바람 부는 빈 들에 홀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대에게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고, 정처도 없고.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의 길입니다.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칠 대로 지친, 후줄근한 속내를 달래며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보듬지 못한 마음에게도, 또 주변에게도 모두 미안하기만 합니다. 그럴 때마다, 꽃이 핀들, 꽃이 진들, 나에게 무슨 향기로울 것이 있어 임의 귓전에 고운 노래를 불러드릴 것인가? 진부陳腐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갈라져 돌아다니던 마음을 붙들어 놓고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외치던 사도 바울처럼 “죄인 괴수” 같은 심령이 가슴을 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끌려온 마음이 그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면, 허물을 덮는 그대 옷자락이 눈시울을 적십니다. 골똘함 저편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면, 길라잡이 새벽 별을 따라 그대 품으로 천천히 돌아갑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하고 그대 그토록 일렀는데, 나는 여제도 이렇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오직 하나, 성소聖所를 이룰 이 작은 심령뿐이건만, 내 중심은 바람에 요동하는 물결처럼 정함이 없습니다.
갈대처럼 잉잉거리는 못난 심사가 자숙하며, 다시 말씀 앞에 조신하게 앉으면 “그대만으로 충분하다!”라는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나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도 둥지 떠난 가시나무새처럼, 사람에게도 위로받고 싶다며 투정부리고 날아다닐, 변덕쟁이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못 믿을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그대는, 오늘도 여상이 바라보시며 “나로 충분하지 않니?” 물으십니다. 정녕 이 바보 같은 ‘나’이어도 되겠습니까? 끊임없이 방황하는 이 떠돌이 말입니다.